BIO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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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RSTONE Of KOREA DESIGN


권명광 디자인 관련 단체 공적

1980-1982년 한국시각디자이너협회(KSVD) 회장
1985-1988년 한국그래픽디자이너협회(KOGDA) 회장
1989-1992년 홍익시각디자이너협회(HIVDA) 회장
1991-1994년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 이사
1995-1997년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회장
1998-2006년 한국디자인법인단체총연합회(KFDA) 회장 / 사단법인 한국광고학회(KAA) 회장 / 한국디자인학회(KSDS) 회원, 일본광고학회 정회원

한국 디자인의 중흥을 실질적으로 선도했던 권명광의 이름에는 다양한 수식어가 따르곤 한다. 한국 그래픽 디자인의 영역을 확대한 선구자, 디자이너의 전인교육과 사회 참여를 강조한 교육자, 디자인 경영자, 각 단체의 협회장 및 심사위원장, 디자이너로서 최초로 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청조근정훈장과 황조근정훈장 등을 수상한 서훈 경력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로서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기에 충분한 이력이다. 그러나 권명광의 이 모든 외형적 활동의 중심에 있는 내면의 신념은 바로 ‘끊임없는 실험과 도전’이다.
“나는 그래픽디자이너로서 다른 어떤 전달 수단보다도 효과적으로 넓고 깊게 사실과 이념을 전달할 수 있는 시각 언어의 훌륭한 ‘이야기꾼’으로서 자신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 시각 언어는 수학 및 과학 언어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통일성을 지향하는 인간 심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여러 가지 표현 방법, 다양한 형태, 색채 등의 제한된 시각적 요소들로 질서를 표출하여 원만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도록 사전 조정하는 대리 관찰자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중략) 
반복된 주제나 외형적인 표현의 동질성이 개성은 아니다. 디자인은 사전에 특정 목적을 위해 관찰자들이 어떻게 보기를 원하는가를 계획하고 시각적인 지시를 하는 것이다.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수많은 실험적인 작품을 해오면서 피곤한 주자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지난 경험들의 잡다한 요소들이 이미지전을 통해서 표출되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또 다른 출발을 위한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명광 -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초창기 활동과 선구적 신호


1964년 홍익대학교 재학 당시 열었던 개인전으로 시작된 그의 활동은, 1968년 제3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 대통령상 수상으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작품은 6.25 이후 재건에 온 역량을 다했던 당시 사회·경제적 여건 속에서, 고부가가치를 가져올 새로운 수출 가능 품목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전략적 착안에서 시작되었다. 이 작품은 또한 다수의 그래픽 매체를 활용한 시각이미지 통합 전략(visual identity)을 보여주는 사례로, 이후 1970년대 한국 기업에 전개될 CI 프로젝트를 포함해 통합 미디어 활용을 제안한 선구적 시도라 평가 받았다.
1960년대는 도안, 응용미술, 상업 예술 등의 명칭이 통용되던, 즉 ‘그래픽 디자인’이라는 용어조차 생소한 시기였다. 권명광은 특유의 천부적인 색감과 데생 실력을 바탕으로 디자인에 적합한 조형성과 표현 소재를 탐구하였다. 인쇄물과 같은 일상의 미디어로 표현되면서 즉각적인 소통 또한 도모해야 하는 그래픽 디자인의 특성을 감안하여, 그는 사실적인 묘사 외에도 대담한 색채 대비, 양식화된 일러스트레이션, 기하학적 패턴, 동시적 시각 인상의 극대화 등을 시도하였다. 가족계획 포스터는 이처럼 디자인의 조형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내놓은 작품으로, 메시지를 강렬한 시각 언어로 표현하며 과감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생활 속의 도구나 오브제, 예를 들면 매직과 에그박스의 이용 역시 당대 디자이너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불투명한 물감의 색감에 익숙했던 1960년대, 당시 처음 등장한 매직펜으로 일정한 폭의 터치와 중첩 효과 등을 실험하며 이전까지는 접하지 못했던 조형성을 보여준 것이다.
작품 ‘투계’는 매직펜의 레이어 효과를 극대화하여 싸움닭의 거친 이미지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또한, 에그박스의 활용은 오브제 사용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주한 미군이 주로 사용했던 에그박스를 어렵게 구해 평면적 표현에 갇혀 있던 이미지에서 탈피하였다. 빛에 의한 입체 효과를 작품에 끌어들인 것이다. 모차르트를 주제로 한 포스터에서 보여준 이러한 시도는 표현 기법의 차원뿐만 아니라 메시지의 차원과도 공명한다. 에그박스의 단순한 형태 반복은 이 작품에서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성, 즉 자연스러움, 단순함, 보편성을 드러내는 표현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명광 -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그래픽 디자인 표현 영역의 확장


1965년 그가 한일은행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하던 시절에도 실험과 도전은 계속되었고, 그래픽 디자인 표현 영역의 확장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이는 개인의 성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사진과 동양화가 대부분이었던 캘린더에 일러스트레이션을 적극 도입하였고,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30여 기업체의 캘린더 일러스트레이션을 제작하며, 당대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에 대한 확장된 인식과 정착에 기여하였다.
지금으로서는 달력에 일러스트레이션을 사용한 것이 그리 대단한 일일까 싶겠지만, 이는 다양한 분야에서의 일러스트레이션 활용을 예고하는 신호탄과 같은 것이었다. 이후 다른 기업에서도 캘린더에 적극 일러스트레이션을 도입하면서 안방과 거실, 사무실, 상점에서 늘 마주하는 시각 이미지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각종 미디어를 통해 풍요로운 시각적 표현을 선사해 주었다.
캘린더에 등장했던 아동 이미지는 일러스트레이션 분야의 또 다른 중심축인 동화 작업으로도 이어졌다. 1972년 제7회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출품작은 동화 편집 레이아웃의 클래식이라 부를 만하다. 그는 이 작품에서 넓은 가로형 판형에 한글과 영어 본문, 일러스트레이션, 여백을 활용한 스타일로 해외까지 염두에 둔 디자인을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나라 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유니세프 카드에 동화 일러스트레이션 기증자로 선택되었는데, 마티스, 달리, 미로, 샤갈, 피카소 등이 참여할 만큼 널리 가치를 인정받는 나눔이었다. 이처럼 그가 캘린더와 동화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처음 시도한 에어브러시 기법, 와트만지에 수채화 표현, 입체 오브제 활용, 형상의 단순화 등은 후세대의 표현 기법 발전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명광 -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그래픽 디자인 표현 영역의 확장

우리가 가장 일상에서 많이 접했던 그의 디자인은 역시 기업 아이덴티티(Corporate Identity)일 것이다. 대웅제약, 롯데칠성, 한국전력공사, 농심, 문화방송 등 많은 기업의 CI 프로젝트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특히 쌍용의 CI는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 차원 CI로 기록된다. 권명광은 이 작업에서 계열사별로 컬러 코드를 적용하고, 처음으로 영문 사명인 ‘SSANG YONG’을 워드마크로 도입하였다. 이외에도 롯데칠성의 최초 한글 워드마크, 정형에서 탈피한 동화은행의 CI 디자인 역시 기존의 한정된 표현 안에서 변화와 새로운 조형성을 찾으려는 시도의 산물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명광 -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교육자 길을 걸으며 교류와 참여를 꾀하다

1970년대 각 대학에서 디자인과를 신설하면서 산업현장에 있던 디자이너들이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권명광도 1973년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디자인 교육 분야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디자인 자문과 심사, 디자인 단체 설립, 프로젝트 진행 및 기고를 병행하며 활동의 폭을 넓혀 나갔다.
후학을 양성함에 있어 그는 디자이너의 적극적인 사회 참여와 인접 분야와의 교류를 강조했다. 경영인, 광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광고학회의 5대 회장에 선출되고, 광고발전공로상을 수상한 것은 디자인의 활동 영역 확장과 인접 분야와의 교류 실천 노력을 인정받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사회참여의 일환으로 ‘한국의 미(1979)’, ‘한국의 색(1981)’과 같은 그룹전시를 추진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와 6.25 등 혼란스러운 역사를 겪은 한국의 정체성을 디자이너들이 시각 메시지로 되짚어 보는 자리로, 이처럼 한국의 정체성을 모색하려는 노력은 이후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관련 작업에도 반영되었다.
당시 디자이너의 사회 활동은 다양한 연합 단체를 발판으로 한층 활성화되고 있었다. 권명광은 한국시각디자인협회(KSVD, 한국그래픽디자인협회(KSGD)의 후신)을 비롯하여 한국그라픽디자인협회(KOGDA),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 한국디자인법인단체총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디자이너의 위상을 높이고 참여를 이끌었다.
1984년 창립된 한국그라픽디자인협회는 독특한 협회전 기획으로 주목받았는데, 전시의 주제는 ‘에너지’, ‘통일’, ‘오늘’과 같은 ‘사회적 메시지’로, 시각적 표현은 ‘실험성 추구’를 기치로 하여 당대 문화예술계의 사회참여에 동참하였다.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VIDAK)를 이끌던 1997년, 그는 국제그래픽디자인협의회(Icograda) 회의를 한국에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부정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한국디자인진흥원(KIDP)과 난상 토론을 벌인 끝에, 그는 한국시각정보디자인협회 사무총장이었던 안상수를 중심으로 하는 유치단을 우루과이 총회장에 파견하였고, 마침내 2000년 서울에서 이코그라다(Icograda) 특별 총회를 개최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는 추후 한국 디자이너들의 국제적인 활동에 힘을 실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권명광-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교육 행정가로의 행적

권명광의 실험과 도전 정신은 교육행정가로서의 행적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에서 수석 부총장 및 15대 총장까지 역임하면서, 그는 바우하우스의 교과 과정을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적용하여 영상디자인, 광고디자인, 포장디자인, 편집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학제로 세분화하였으며, 현재 많은 대학의 디자인학과 편제가 이러한 체계를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과감한 시도라 평가 받은 것은 미술대학의 입시 실기고사 폐지였다. 이전부터 대학들은 미대 입시에서 드러나는 학원 중심의 획일화된 실기 준비, 상업화 등의 폐단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다들 방법만 모색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권명광은 총장 재임 시절에 실기고사 폐지라는 방식으로 고질적인 문제와 과감하게 단절하여 학생들의 잠재된 능력에 따라 신입생을 선별하겠다는 결단을 내렸다.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았으나 권명광 자신이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교육자였기 때문에 우려하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이를 발판으로 다른 대학들도 새로운 입시 방안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권명광이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은 디자인 분야가 아직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분화되고 전문화되기 이전이었다. 그는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계속해온 뛰어난 디자이너인 동시에, 디자인의 정책과 제도, 교육에 이르기까지 한국 디자인의 발전을 이끌어온 디자인 행정가이자 디자인 교육가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를 ‘전인적인 디자인 실천가’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권명광은 2009년 홍익대학교 총장 은퇴 후 현재 상명대학교의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 후학 양성과 디자인 비평, 저술, 작품 활동 등 디자이너로서, 교육자로서, 디자인 분야의 리더로서의 행보를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그는 홍익대학교 총장 재임 시절에도 매일 아침 일찍 연구실에 나와 ‘사자성어’를 주제로 한 타이포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진행하였고 퇴임 후 전시회를 열었다. 디자이너 초년 시절인 1960년대 포스터에 사용한 에그박스 소재를 다시금 재해석하는가 하면, 기업의 고문으로 여전히 현장에서 디자인, 프로모션, 환경디자인 등에 참여하고 있다.
고희를 넘긴 지금에도 그의 작품 의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명광 - 그래픽 디자인의 선구자 (디자이너 열전, 이수진) 2014년 3월 20일